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3차 중동전쟁 (문단 편집) === 요르단의 참전 === 한편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요르단을 동시에 상대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요르단 측에서 어떤 공격이 날아오더라도 무시하란 지시를 받았다. 당시 예루살렘엔 50대의 셔먼 탱크, 36문의 대포, 27문의 박격포만 있었고, 대부분의 탄약을 이집트 전선으로 보내버린 상황이었다. 오전 7시 55분, 공습 경보 사이렌이 텔아비브에 울렸다, 이스라엘은 이것이 오경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요르단의 공격이었다. 이스라엘은 요르단이 참전하더라도 1차 중동전쟁 때 많은 아랍 국가들이 그랬듯이 상징적인 포격 몇발만 하고 끝낼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리고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에슈콜 내각은 후세인 국왕에게 참전하지 말 것을 강력히 부탁하였다. 이에 대해서 모셰 다얀 장군은 후세인은 어차피 공격하지 않을 건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고 경고해줄 필요가 없다고 할 정도였으나, 이갈 알론은 반드시 국왕에게 경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미국 국무부, 영국 외무부, 예루살렘의 유엔 감시관인 오드 불 장군을 통해서 요르단에 경고가 전해졌으나, 불 장군은 이것은 명백한 협박이라면서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한편 후세인 국왕은 전군에 전투 태세를 발령한 상태였고, 8시 50분에 아침 식사 중에 전쟁이 터졌음을 보고받았다. 후세인은 아메르로부터 가짜 승전 보고를 들었으며, 수백 대의 전투기가 이스라엘로 날아간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수백 대의 전투기는 귀환하는 이스라엘 전투기들이었으나 요르단은 이것을 이집트 공군으로 착각했다. 후세인 1세는 아직 결단을 내리지 않았으나 리야드 장군은 후세인의 허가도 없이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였다. 요르단군은 일제히 포격, 공급, 특수부대 투입을 시작하였다. 이는 이집트군이 곧 북상해서 요르단과 합류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취해진 것이었다. 한편 나세르가 그에게 전화하여, 아메르가 주장한 이스라엘 공군의 파괴는 사실이며, 유엔 정전령이 내려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점령하라고 부추겼고, 9시 30분, 후세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를 대국민 방송을 통해 선포하였다. 그리고 미국 대사 번스가 이스라엘의 경고를 전달하자 "전쟁은 그들이 시작했소. 이제 답장은 공중을 통해 전달할 것이오. 주사위는 던져졌소."라고 묵살했다. 10시부터 요르단군이 [[M59 155mm 평사포]]를 텔아비브와 라마트 다비드에 쏘아대기 시작했다. 요르단군은 포병대에 '모든 적'을 쏘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요르단군은 군사 시설은 물론 민간 시설도 닥치는 대로 포격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요르단군의 공습도 시작되었다. 피해는 민간인 1명 사망, 7명 부상에 수송기 하나가 파괴된 것으로 그쳤으나 이스라엘 국민들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주 요르단 소련 대사는 후세인의 궁전에서 미국 대사 번스를 만나 누군가 아랍을 막지 않으면 이번 전쟁은 아랍이 이길 것이라고 발언하였다. 이때부터 요르단의 공격은 거세져서 예루살렘 신 시가지에 6천발의 박격포를 발사했다.[* 주 이스라엘 영국 대사 해도우는 농장과 도시의 인구 밀집 지역을 무차별적으로 포격하였으며 요르단이 이스라엘에게 군사적 대응을 하도록 강요하였다고 보고하였으나 영국 외무장관 브라운은 아랍 국가들의 의견을 의식하여 이를 묵살하였다.] 크네세트와 정부 기관들도 공격당했고 요르단은 이스라엘 정부 시설들을 대부분 점령했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냈다. 요르단의 무차별 공격으로 병원과 교회들도 파괴되었으며 수천 명의 시민들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은 12시 30분에 즉각 반격에 나섰다. 형편없는 공습을 하고 귀환해 재급유를 하던 암만과 마프라크의 공군 기지는 이스라엘의 공습에 9분 만에 초토화되었다. 1시 10분에 있은 2차 공습으로 요르단 공군의 [[호커 헌터]] 20기는 모조리 파괴되었다. 이스라엘의 미스테르는 딱 한 대 격추되었다. 후세인 1세는 집의 정원에서 자기 공군은 물론이고 그와 친분이 있던 파일럿들이 떼죽음당하는 것을 아들들과 보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바스만 궁전도 박살났는데 만약 후세인 1세가 계속 궁전의 집무실에 있었으면 그의 목숨도 날아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광경을 보면서 이집트와의 동맹을 반대했던 후세인의 고문인 와스피 알 탈은 PLO 지도자이며 나세르 추종자로 유명했던 슈크라이에게 "당신네 그 잘난 미그기와 미사일들은 다 어디 간 거야."라고 울부짖었다. 이스라엘은 준비해둔 비밀 신병기인 L 미사일까지 동원하여 요르단군 [[방공호]]들을 날려버렸고, 요르단군들은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떨어뜨린 것으로 오해하고 기절초풍해서 앞다투어 항복했다. 11시 40분, 불 장군의 휴전 제의에 이스라엘이 수락하였으나, 요르단 수상 주마는 "우리는 지금 과거의 과오를 씻어낼 가장 성스러운 시간에 직면했다. 우린 지난 수년간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모두 무기를 들고 유대인들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으라"는 선동 방송을 내보냄으로 이를 거절하는 자책골을 넣었다. 이에 요르단군은 과거 영국 위임통치령 총독부가 있었고, 당시에는 유엔 감시단 본부가 있는 정부 고개를 무단으로 점령했다. 이런 막 나가는 행동에 이스라엘은 요르단군이 예루살렘에 이미 수백 대의 탱크를 매복시켜놓기라도 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마침내 에슈콜 내각은 요르단 전선에서의 수세적인 태도를 버리고 총공세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이츠하크 라빈은 이미 요르단 공군을 전멸시켰는데 과격하게 나갈 것이 없다고 반박했으나 다얀은 이미 병력에 공세 명령을 내린 후였다.[* 정작 다얀은 각의에서 요르단과의 전쟁에 반대한다고 해서 동석한 장교들은 '이 새끼가 대체 뭘 원하는 거지?' 하고 당황했다.] 결국 이스라엘 육군의 반격에 요르단 육군도 개박살이 났다. 비록 이들은 매우 악착같이 맞서 싸웠고 특히 '탄약 고개' 전투에서는 포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요르단 부상병들이 수류탄을 들고 "[[알라 후 아크바르]]!"를 외치면서 자살 돌격까지 감행했다. 전쟁 후 미국 영사관에서부터 YMCA에 이르는 600미터의 거리를 죽음의 거리(Simtat ha-Mavet)라고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압도적 화력 속에서 더 이상 버티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요르단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6월 6일, 요르단 군부는 예루살렘 구 도시를 제외한 전 지역이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다. 리야드 장군은 후세인 국왕에게 신속하게 결정하지 않으면 요르단은 멸망할 것이라면서 당장 정전을 맺든지 총퇴각을 지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후세인 1세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대사를 소환하여 자신의 정권이 즉각적인 교전 중지가 없으면 1시간 안에 멸망하게 생겼다고 하였다. 하지만 공식적 정전은 곧 항복이나 마찬가지였고, 이집트가 여전히 싸우고 있는데 그랬다간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며 군대도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군대를 물리면 나세르가 다 이겼는데 요르단 때문에 졌다고 덤태기를 씌울 수 있었다. 번스 대사는 요르단은 전쟁 중보다 전쟁 후의 안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솔직하게 평가했다. 심지어 나세르가 요르단 민중에게 후세인을 축출하고 계속 전쟁할 것을 호소할 수도 있었다. 이에 후세인은 이스라엘과의 비밀 협상, 혹은 국제적인 제의에 따른 협상이라는 모양새 좋은 탈출구를 모색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요르단군의 저항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 저의를 의심하면서 4차레의 후세인의 비밀 정전 요구를 모두 묵살했다. 미국의 반응도 냉담하였다. 극도로 실망한 후세인에게 나세르는 미국과 영국이 이스라엘 편에서 공격하고 있다는 또다른 가짜 뉴스를 내보내자고 제의하면서 미국만 비난할지 영국도 비난할지를 물었으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런데 영국이 아직도 [[항모]]를 가지고 있던가요?" 후세인은 영국도 비난하자고 했고, 시리아도 동참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이 대화는 모조리 이스라엘 첩보부에 도청당했고 영국과 미국은 길길이 날뛰었으며 성깔 더러운 린든 존슨은 Big Lie라고 맹비난했다. 다만 나세르의 경우에는 정말로 거짓말을 했다기보다는 이스라엘군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공격 속도에 너무 멘탈이 나가서 분명히 미국 항모 전대가 지중해 앞바다에서 이스라엘 공군을 지원해주고 있다는 [[정신승리]]를 하는 것에 가까웠다. 요르단의 절박한 지원 요구에 시리아와 사우디가 요르단을 돕겠다고 했으나 시리아 17 기계화 여단은 오다가 중간에 돌아가버렸고, 사우디 군대는 이스라엘 비행기가 근처에 총알 한 방이라도 쏘면 "우리도 싸웠다!"라고 주장하고 달아나기 위해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오로지 이라크군 8 여단만이 실제로 도와줬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당했다. 결국 후세인은 지프를 징발해서 도주하는 수밖에 없었고 웨스트뱅크와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모두 함락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